-서정성과 서사성-
김은주
*열며
* 서정적 수필 : 일상생활이나 자연에서 느낀 것을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수필이다.
* 인간과 자연의 교감(交感)을 기초로 하여 자연에 대해 서술한 것이 많다.
* 표현 기교에 유의하기 때문에 공리성보다 예술성이 강조된다.
예) 이효석의 '청포도 사상', 이양하의 '신록 예찬', 김진섭의 '백설부', 이병기의 '백련(白蓮)' 등
* 서사적 수필 : 인간 세계나 자연계의 어떤 사실에 대하여, 대체로 작가의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한 수필이다.
* 내용의 사실성, 서술의 정확성이 중요시된다.
* 평소의 날카로운 관찰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 기행(紀行) 수필을 비롯하여 근대 초기에 유행하였다.
예)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이희승의 '딸각발이' 등
*펼치며
-서정수필에 대한 소고(小考)-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체로 잔잔하게 전달하는 서정성이야 말로 수필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어떤 글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가깝게 맞아 떨어질 때다. 글쓴이의 심중을 이심전심으로 독자가 알아차리고 감동까지 받게 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글은 없다고 본다. 자연을 보고 느낀 감정이나 내적 심리상태, 정서 따위를 나만의 감성으로 써 내려가면 곧 서정수필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기억의 한켠에 지니고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것, 일체의 계산이 개입되지 않은 대상이나, 처절하게 사랑하고 그 이유로 미워했던 것과 화해를 도모하는 일이다.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로부터 나오는 정이 바탕이 되어 만물을 껴안는 작업이 서정의 힘이요, 그 서정의 그늘에서 미를 심는 작업이 서정수필쓰기의 근본이라고 본다. 시가 서정이라면 소설은 서사라고 본다. 수필은 그 사이에 있는 다리다. 서정도 서사도 다 아우를 수 있는 문학이다. 서정수필은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한 초점으로 모아진 서정이나 사색을 있는 그대로 산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 우리 수필문단을 서정 일색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서정성은 수필에 있어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그나마 수필의 진면목을 거기서 쉽게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사수필에 대한 소고-
서사수필이란 간단히 말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 적은 글이다. 수필 안에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구조 안에 사실성과 경험적 서사로서의 진솔함이 들어있어야 서사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대체 서사란 무엇일까? “어떤 인물의 행위가 일정한 줄거리를 갖추면서 시간적 흐름에 따라 이야기 되는 양식”이다. 경험이나 기행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본래 서사라 함은 소설의 것인 냥 보이지만 소설속의 서사와 수필의 서사는 분명 다르다. 소설의 서사는 허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수필의 서사는 경험이나 사실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똑 같은 서사 이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요즘 문단은 시는 산문시라해서 수필만큼 길어지고, 소설은 나뭇잎 한 장에 다 적을 수 있다는 엽편(葉篇) 소설도 생겨났다. 내용에 상관없이 분량만 따지자면 내 생각에 수필의 부피와 거의 비슷해졌다고 본다. 종이 보다는 사이버로 주고받는 글의 형태가 많아지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러다 보니 문학의 장르 경계도 많이 모호해 졌다.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수필이 모두를 포용 할 수도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하여 서정이든 서사든 수필영역은 더 할 수 없이 넓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닫으며
우리가 “글은 왜 읽고 쓰는가? 짧게 말하면 세상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다. 내가 세계와 부딪히고 억눌릴 때, 그 세계와 소통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이 세계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찾아가는 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흔히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 내 체험을 자세히 관찰 할 것,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끝가지 직시하다 보면 그 속에서 삶의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는 그 체험을 통해서 나의 욕망과 감정을 통찰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에도 내 욕망과 감정은 얽혀있기 마련이므로 그 인과를 잘 살펴보는 것이다. 마지막은 성찰의 단계다. 이제껏 살펴보고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는 것이다. 수필은 대개 이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고 본다.
그럼 현대인이 “수필을 사랑 하는 이유는 뭘까’ 대답은 간단하다. 수필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 때문이다. 수필은 시와 같은 응집력이 없으며, 소설 같은 파란 만장한 드라마에서 오는 복합적인 감동도 없다. 그저 친한 이와 둘러 앉아 속삭이는 귀엣말 같고,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솔직함이 있으며,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삶의 예지가 있다. 수필이 바쁜 현대인들에게 가장 빨리 닥아 가는 이유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수필의 온기는 사람의 체온과 비슷하다고 들었다. 전통가요의 박자와 섹스폰의 음이 우리 몸속에 있는 주파수와 거의 비슷해 아무 저항 없이 감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듯이 수필 또한 그러하다고 본다. 그리고 수필의 가장 큰 미(美)는 균형에 있다고 본다. 치우침이 없는 조화의 미학. 알맞게 생략하고 알맞게 비약했을 때 그리고 체험의 솔직성과 현장감이 적절히 베여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수필의 전성시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글쓰기를 뿌리치고는 존재 자체가 어려워진 세상이다. 이렇게 밤길을 걸어 글을 만나러 오신 문우들은 이미 삶의 유리한 고지하나를 선취했다고 본다. 나는 수필의 장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문학적 소양과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무장한 후배들이 나와서 올인 할 때 수필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울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읽기(서정수필) -
달빛과 나비
최민자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에서는 달빛냄새가 난다. 청아한 그의 가야금 연주는 댓잎에 듣는 빗방울이었다가, 빠르게 일어나는 구름이었다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였다가, 이윽고는 고요한 달빛이 되어 천지간에 흐뭇이 내려앉는다. 잦아지는가 싶다가 사뿐 살아나는 산조의 선율은 천상의 궁궐에 사는 요정이 서둘러 은하수를 건너가는 작고 날랜 걸음새도 같고, 그 요정의 옷자락에 묻어 있는 열사흘 달빛 같기도 하다.
흰 명주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고 무대 위에 앉아 있던 선생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조용한 카리스마라고 할까, 옷고름을 한 쪽으로 가지런히 개키고 정좌를 하고 앉은 모습에서 긴 세월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기품이 넉넉하게 배어나는 듯하였다. 그가 악기를 받드는 손길은 첫날 밤 새신랑이 신부의 저고리 앞섶을 풀듯, 조심스럽고도 경건하였다. 어떤 무대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대가다운 풍모라 할까.
선생의 가야금소리에서 나는 노을 속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만나고, 결 고운 비단치마가 풀숲을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이른 봄, 꽃들이 벙글어 터지는 소리와 늦가을 들녘의 바람소리를 만난다.
명기(名器)도 명기(名技)를 만나야 빛을 발하는 법. 좋은 연주가를 만나지 못한 악기란 나무토막에 불과할 뿐이다. 벙어리 나무통에 혼을 불어넣어 감추어진 소리를 길어 올리는 일이 훌륭한 연주가의 몫인 것이다. 그가 아껴 연주하는 가야금은 자고동(自枯桐)으로 만들어졌다한다. 자고동이란 바위틈 같은 데서 자라다 스스로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일컫는데, 악기 중에서도 가야금은 자고동으로 만든 것을 최상으로 친다. 밭둑에서 쉽게 자란 오동은 소리가 잘 나지 않고 힘들게 자란 오동일수록 좋은 소리가 난다 하니, 맑고 야무진 소리를 내는 대금이 쌍골죽과 같은, 돌연변이성 병죽(病竹)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시련과 좌절을 겪은 사람만이 인생의 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듯이, 한이 한없이 안으로 잦아들어 죽을 고비에 이르러야만 심금을 뒤흔드는 절창의 가락을 쏟아놓게 되는 것일까.
선생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이 없고 유려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잠든 가얏고를 무픔 위에 얹혀 놓고 뜯고 퉁기고 누르고 흔드는 손놀림이 성애를 알지 못하는 신부의 관능을 자극한 사랑으로 일깨워 가는 남정네의 손길만큼이나 정성스러워 보였다.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를 거쳐 휘모리로 풀어내는 산조가락의 흥취는 켜켜이 쌓인 여인의 정한이 주춤주춤 불꽃을 머금다 마침내는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아 휘황한 불꽃으로 산화해버리는, 한바탕 육체의 향연과도 같았다.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 - 즐거우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은 - 선계의 가락이 달빛처럼 충만하다. 나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신 새벽 호숫가, 이제 막 번데기에서 깨어난 나비가 달빛에 젖은 날개를 턴다. 조금씩, 조금씩 푸드덕거리며 서툰 날갯짓을 시작한다. 나비가 푸르르, 달빛 사이로 날아오른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노랑 바탕에 까만 무늬가 찍힌 호랑나비, 보랏빛 작은 날개를 가진 부전나비, 모시나비, 제비나비, 배추흰나비, 꼬리명주나비... 하늘은 오색 날개로 눈부시고, 날갯짓 소리로 세상이 현란하다. 연주가와 악기가 혼연일체로 어우러지는 신비스런 법열의 춤사위, 도도한 악흥이 빛의 꽃가루가 되어 칠흑의 세상 위에 쏟아져 내린다.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나비들이 하나 둘 내려앉는다. 술렁이는 축제도 막을 내리고 호수에는 달빛만 교교하다. 제의를 치르듯 숙연하게 줄을 뜯던 선생의 손길도 멈추어 있다. 지악무성(至樂無聲) - 소리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고즈넉한 정적이 깃든다. 밝은 달무리를 삼킨 것 처럼 비로소 가슴이 환하게 트여 온다.
*작품평
‘달빛과 나비’는 가야금 선율에 도취된 심적 열락(熱樂)을 그려낸 글이다. 독자의 혼마저 빼버릴 정도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이 글에는 서사적 행위가 없다. 정중동(靜中動)이라는 현대기법이 끝까지 지배한다. 서술자이자 청자인 주인공의 외적 행동을 의식적으로 배제한 이유는 한 가지다. 내적 긴장미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외적 행동을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깊은 심연일수록 그 바닥에서는 격류가 소용돌이치는 법이다. 황병기 선생이 달빛을 받으며 가야금을 타는 동안 귀 기울이는 화자의 실루엣은 마치 이스터섬의 석상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초연하기조차 하다. 영혼이 음악의 선율을 받아드리고 육신이 우주의 생명을 흡입하면 어떨까. 아마 부동의 몸가짐을 지켜내는 화자와 같으리라. 하지만 그 침묵의 심연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미적 충동이 요동치고 있다.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에서는 달빛냄새가 난다. 청아한 그의 가야금 연주는 댓잎에 듣는 빗방울이었다가, 빠르게 일어나는 구름이었다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였다가, 이윽고는 고요한 달빛이 되어 천지간에 흐뭇이 내려앉는다.”
“가야금에서 달빛냄새가 난다.” 평자는 지금까지 악기 소리를 이렇게 간결하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옮겨준 글을 만나지 못하였다. 청각과 시각과 후각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달빛냄새’ 같은 이미지야말로 수필의 소재에 접근하는 작가 특유의 소통방식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오감과 온몸을 통해 천지가 조화를 부리는 소리를 만나고 있다. 그 덕분에 독자는 언어의 열락을 음미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몸짓은 삿된 독자가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엄숙하다.
연주자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는 모습에는 “첫날밤 새신랑이 신부의 저고리 앞섶을 풀 듯 조심스럽고” 경건한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성(性)과 성(聖)의 만남을 꾀한 다랄까, 음악의 기운에 감싸인 작가는 기러기를 바라보고 결 고운 비단치마 소리를 듣고 봄꽃이 벙글어 터지는 냄새를 맡는다. 이로써 기러기, 비단치마, 파열의 냄새라는 3중 이미지는 초례 장면을 연출해낸다.
“잠든 가얏고를 무릎 위에 얹혀 놓고 뜯고 퉁기고 누르고 흔드는 손놀림이 성애를 알지 못하는 신부의 관능을 지극한 사랑으로 일깨워 가는 남정네의 손길보다 정성스러웠다.”
가야금을 “뜯고 퉁기고 누르고 흔드는 손놀림”이 자아내는 것은 엑스트시다. 그 희열은 성애적 환희와 가깝다. 창작의 희열이 성애의 절정과 같다면 창작의 고통 또한 죽음의 고통에 일치한다. 희열과 고통의 동일시는 여인의 정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주춤주춤 불꽃을 머금다 마침내는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아 휘황한 불꽃으로 산화해 버리는” 죽음의 향연을 비단치마를 끄는 소리에서 상상해내는 청력은 육신의 귀로서는 불가능하다. 체험 이상의 영적 교감이 필요하고, 소리를 채색하는 언어적 감수성이 깔려야한다. 그 시적 기법이 반영된 이미지가 ‘달빛과 나비’를 낳았다고 할 것이다.
작가는 가야금의 환상적인 선율에서 어떻게 깨어나는가, 그 깨움을 이끌어내는 촉수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나비로의 변신이다. 작가가 ‘달빛 냄새’라는 엑스터시를 만끽하면 ‘달빛과 나비’를 구상한 후, 주변 풍경은 정적에 휩싸인다. 호숫가에 새벽이 찾아오고 작가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소리의 춤사위는 나비로 바뀌어 진다.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나비들이 하나 둘 내려앉는다. 수천수만의 나비 떼가 일시에 하늘로 날아오르던, 술렁이는 축제도 막을 내린다. 호수에는 달빛만 교교하다. 제의를 치르듯 숙연하게 줄을 뜯던 선생의 손길도 멈추어 있다.”
모든 생명의 끝처럼 축제도 끝난다. 축제의 시작과 끝은 연주자의 손에 달려 있지만 현실에서는 나비가 날갯짓을 멈추면서 내려앉은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당연히 작가의 손길도 멈추게 된다. 그러면 상사의 깃을 접어야하는가, 아니다. 작가의 창작은 여기서 끝날 수 없다. 그 이유를 마지막 구절이 설명해준다.
“밝은 달무리를 삼킨 것처럼 비로소 가슴이 환하게 트여온다.”
달무리를 삼켰다. 달을 삼키는 행위는 민속적인 제의로서 잉태를 상징한다. 인식론적으로 풀이하면 깨우침이며, 프로이드의 해석에 따르면 성애적 갈망을 나타내준다. 물론 작가의 경우, 달무리는 육체적 향연이아니라 예술적 소망과 관련된다. 그 사실은 가야금이 되기 위해서는 오동이 말라죽어야하는 이치와 같다. 최상의 가야금은 바위틈에서 스스로 자라다가 말라죽은 자고동(自枯桐)으로 만들어진다고 작가가 설명하듯이 시련과 좌절의 삶이 남다른 수필을 만든다. 벙어리 나무통에 혼으로 소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 연주자의 몫이라면 작가는 모름지기 자신의 몸을 벙어리 나무통으로 삼아 언어에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할 것이다. 시퍼런 장검같은 달빛을 삼킨 최민자, 그녀는 언어와 빛과 색이 하나가 될 때 남다른 작품이 완성된다는 명제를 구현하였다. (박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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