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 3집/가재미 요약>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197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95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시 「處署」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5 오늘의 시’ 설문 조사에서 가장 좋은 시인으로 선정이 되기도 하였으며 제
21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론 『수런거리는 뒤란』『맨발』 등이
있고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에 있다.
**묽다**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 운문사 뒤뜰 천년을 살아을 법한 은행나무 있더라
그늘이 내려앉을 그늘자리에 노란 은행잎들이 쌓이고 있더라
은행잎들이 지극히 느리게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
오직 한 움직임
나무는 잎들을 내려놓고 있더라
흘러내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더라 흘러내려도 저리 고와서
나무가 황금사원 같더라 나무 아래가 황금연못 같더라
황금빛 잉어 비늘이 물속으로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있더라
이 세상 떠날 때 저렇게 숨결이 빠져나갔으면 싶더라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
내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다 가고 싶더라
**산비 소리에**
누가 푸른 똥을 누시나
떨어져 번지는, 이끼처럼 번지는,
더 번져 몽글몽글 맺히는 똥
맺혀도 몰랑몰랑한 똥
푸른 벌레가 산자두잎 뒤 잎사귀 처마로 들어가
동글동글한 똥을 피한다
목주름 펴 처마 바깥을 갸웃거리다
잔다랗고 말랑말랑한 푸른 똥 누고 자울자울 존다
잎사귀 처마를 득득 긁는 산비 소리에
윗니 아랬니 돋아 간질간질한 산비 소리에
**시월에**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헤죽, 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기러기가 웃는다**
젊어 남편을 잃고 재가해 얻은 외아들마저 잃은 그녀
언제부터 그녀가 기러기를 기르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기러기는 매일 북쪽 하늘 언저리를 날다 그녀의 집으로 돌아온다
기러기도 마음이 있어 하늘을 서성거린다, 고 그녀는 말한다
하늘 끝을 날다 다시 돌아서고 마는 그 그리움의 곡면
그녀가 기러기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오늘은 기러기가 새끼 기러기를 등에 업고 날더라고
하늘 구경을 시키더라고 그녀는 기러기 예기에 좋아라 한다
누렇게 늙어 누운 오이 같은 그녀가 뜨락에 앉아 웃는다
날지 못하는 기러기가 웃는다
**빈집의 약속**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대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아, 24일**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 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小川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같다
**오, 가시등불!**
삯바느질로 끼니를 이어가던 貧女의 집인데
가시로만 이루어진 육체인데
나지막한 처마에 등불을 내걸었다
탱자나무가 노오란 탱자를 아그대다그대 매달았다
오, 가시등불!
푸른 가시를 구부려 구부려서 만든
빛 덩어리
가슴속은
텅 비고
마른 가시들로 새들새들하고
바깥을 밝히려
조랑조랑 매달린 노오란 탱자들, 빛들
모든 빛은 끔찍하게도 제 몸을 태운 것이니
이 눈물겨운 공양을 누가 받을 것인다
빗속에서도 기름등불은 자글자글 타오른다
**언젠가 다시 가본 나의 외갓집 같은**
산등성이 신갈나무에 빈 들 미루나무에 새들의 집이
아직 얹혀 있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에 가리워져 있지만 겨울에는 저곳이
새들의 둥지라는 걸 안다
너무 멀지는 않게 마을 근처에 여럿 손에 결은 솜씨로 지어놓았다
알몸 빠알간 새끼들의 우는 소리가 없고, 공중에 발길도 끊어진
텅텅 빈, 빈집들이다
날개를 한번 푸덕거려 떠났어도 묵은 집 벽처럼 줄금 간 가슴은 두고 간,
언젠가 다시 가본 나의 외갓집 같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결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門 바깥에 또 門이**
구멍이 구멍을 밀고 가는 걸 보여주는 한 마리 게
내 눈 속의 개펄을 질퍽질퍽하게 건너간다
진흙 수렁을 벗어나도 바깥에 진흙 수렁이 있고
문을 벗어나도 문 바깥에 문이 또 있다
돌집 하나 없이 우리는 문의 안과 밖에서 살아갈 것이다
붉은 집,
축축한 노을이 우리가 머물 마지막 집이 될 것이다.
**매화나무의 解産**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꼽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임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
**옥매미**
낮 동안 나무 그늘 속에서 매미가 울 적엔
밤이 되어도 잠이 얇다
나는 밤의 평상에 누워 먼 길 가는 별을 보고 있다
검게 옻칠한 관 속을 한 빛이 흐른다
빛에도 *客愁가 있다
움직이는 빛 사이를 흐르며 나는
목숨이 다하면 가 머무르는 *中陰을 생각하느니
이생과 내생 그 사이를 왜 습한 그늘이라 했을까
매미는 그늘 속을 흐르다 나무 그늘로 돌아온 목숨
매미는 누굴 찾아 헤메어 이 여름을 우나
죽은 이의 검고 굳은 혀 위에 손톱만 한
옥매미를 올려주는 풍습이 저 고대에 있었다
슬픈 상징이 있었다
*객수 ;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한 마음, 旅愁, 客恨
*중음 ; 불교에서의 中有. 사람이 죽어서 다음의 생을 답을 때까지의 동안, 곧, 죽어 49일 동안
**木鐸**
쪼는 게 습성인
딱따구리가
상수리나무에 와서
상수리나무를 쫀다
나무는
목탁처럼
눈 뜨고 자는 물고기
몸을 새한테
내주고
서서
더불어 운다
늙은 나무는
명치가 어서
텅, 텅, 텅
헐겹게 운다
*孟冬 대낮
굿당처럼
*맹동 ; 초겨울, 음력 시월
**겨울밤**
그믐달은 우물물처럼 차오르고
잠든 아이는 꿈에서도 자라나네
세월은 가을꽃처럼 *早白하고
기러기는 찬 북쪽을 날아가네
찬비가 내 창에 겨처럼 우수수 지네
보아라
너는 어찌해 얼굴이 그리 거칠거칠한가
*조백早白 ;머리털이 일찍 셈
**흙을 빚다**
물웅덩이만 한 흙으로 사람을 빚으리
잔주름으로 흐늘흐늘해진 사람을 빚으리
다시 쳐대서
춤추는 날의 대낮보다 환한 얼굴을 빚으리
꼴 베는 소년의 하얀 종아리도 빚으리
다시 주물러
물꺼러미 무언가 바라보는 기다란 길 같은 눈빛을 빚으리
흙비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의 얼굴도 빚으리
나에게 무심한 한때가 있어
물웅덩이만 한 흙으로 사람을 빚으리
쳐대고 빚어 응달에 두면 늙으며 늙으며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오, 얼굴이여 몸이여
물웅덩이만 한 흑으로 사람은 다시 빚지 않으리
**찰라 속으로 들어가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몸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모든 찰라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날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평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슴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재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해설/극빈의 미학, 수평의 힘/이광호**
일인칭 주체의 서정적 권위를 비껴가는 좀더 겸손하고 사소한 서정성을, 여기 ‘측백나무’하나가 정말 서정시적으로 서 있다.
측백나무 곁에 서 있었다
참새 떼가 모래알 같은 자잘한 소리로 축배나무에서 운다
그러나 참새 떼는 측백나무 가지에만 앉지는 않는다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참새 떼는 나의 한 장의 백지에 깨알 같은 울음을 쏟아놓고 감씨를 쏟아놓고
허공 한 촉을 물고 그 긴 끈을 그 긴 탯줄을 저곳으로
저곳으로 끌고 가 버리고 끌고 가 버리고
다만 때로 모여 울 때 허공은 여드름이 돋는 것 같고
바람에 밀밭 밀알이 찰랑찰랑하는 것 같고 들쥐 떼가 구석으로 몰리는 것 같고
그물에 갇힌 버들치들이 연거푸 물기를 털어내는 것 같다
측백나무 곁에 있었으나 참새 떼가 측백나무를 떠나자
내 감각으로부터 측백나무도 떠났다
사방에 측백나무가 없다---「측백나무가 없다」전문
‘측백나무 곁에 서 있었다’로 측백나무와 일인칭 ‘나’와의 관계는 전형적인 서정시의 설정 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일인칭의 시선으로 측백나무를 대상화함으로써, ‘나’와 세계와의 일체감을 경험한다. 근데 시는 엉뚱하게 참새 떼를 등장시킨다. 참새 떼의 움직임은 이 고요한 장면에 시간의 사건성을 개입시킨다.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라는 시적 명제에 주목하자.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다. 시간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나’는 시간의 주재자가 아니다. ‘내’가 시간의 중심인 이유는 다만 시간에 대한 ‘나’의 감각 때문이다. ‘나’의 감각 안에서만 시간의 사건은 인지된다. 참새 떼가 ‘허공’ 속에서 벌여놓은 움직임, 혹은 그 움직임에 대한 ‘나’의 감각을 보자, ‘나의 시간, 허공’의 시간-공간 속에는 우주적인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그 시간들을 느끼는 것은 ‘내 감각’이다. 허공의 순간 속에서 우주적인 시간과 공간을 보는 사유, 그 ‘긴 탯줄’을 보는 사유는 불교적이다. 그런데 그 사유를 낳은 것은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관념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내 감각’이다. 참새 떼는 측백나무가 있는 시간-공간의 깊이와 부재를 감각하게 해주는 존재이다. 그래서 ‘참새 떼가 측백나무를 떠나자 내 감각으로부터 측백나무도 떠났다/사방에 측백나무가 없다’는 문장으로 이 감각의 사건이 완성된다. 재래적인 서정시에서, 나와 대상과의 동일성의 체험은 ‘영원한 현재’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안에는 일인칭의 절대적인 시선만이 있을 뿐, 시간의 균열이 없다. 하지만 이 시에서 측백나무는 현존과 부재라는 균열의 사건을 드러낸다. 그 사이의 우주적 시간을 감각하게 해주는 것은, 일인칭 주체의 인식론적인 권위가 아니라, 참새 떼라는 수평적인 다른 존재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참새 떼’와 측백나무‘는 ’나‘와의 동일화 거정 속에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들의 사건을 드러낸다.
또 다른 사라짐의 사건을 보자.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마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 앉던 그들은---「그맘때에는」부분
‘사라짐’이라는 사건은 시간성 속에 처해 있는 모든 존재들의 운명이다.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은 ‘그맘때’가 되면 사라진다. ‘잠자리-나’는 그맘때가 되면 사라지는 존재‘라는 의미 자질을 공유한다. 잠자리는 ’나‘를 비유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비유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잠자리‘는 ’나‘의 정서적 내면을 표상하기 위해 동원된 사물에 머물지 않고, 끝내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잠자리의 묘연한 행방이야말로 이 세계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상징적 질문의 핵심이다. 이러한 ’겸손한 서정성‘은 대상을 ’나‘의 내면적 표상으로 구ㅠ정하지 않고, 그 존재의 행방을 통해 ’나‘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다듬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서정적 자아는 우주적인 공간으로 확장되지 않고, 오히려 사소한 부재의 공간 속에 머문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와 같은 의미 심장한 문장을 보자. ‘금강’이라는 불교적인 용어가 시사하는 것처럼,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는 석가모니의 뛰어나고 강인한 경지는 ‘무른 나’의 것이 아니다. ‘완고한 비석’의 진리와 잠언, 그 단단한 영원성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잠자리 떼’의 자리에, 다시 ‘나비 떼’가 날아든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극빈」 전반부
이 시는 시적 자아의 미적 자의식의 일부가 날카롭게 드러나는 시이다. 서정시가 기본적으로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면, 이 시 역시 전형적인 독백의 형태를 보여준다. 고백은 시적 화자의 미적인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그 고백의 ‘半투명성’을 의미한다. 시적 고백은 드러내면서 감춘다. 혹은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열무’는 줄기와 잎, 뿌리 등을 먹기 위해 심는 채소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게을러’ 열무의 뿌리와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끛을 얻는다. 꽃이 피기 전에 여루를 뽑아 식용의 대상으로 삼았어야 했겠지만, 도 그 수확의 때를 놓치고 대신 꽃을 얻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고 묻는다. 이 시의 화자는 무의 현실적인 효용성, 즉 식용의 대상인 줄기와 뿌리를 놓치고, 그 대신 현실적으로 소용없는 ‘꽃’을 얻었다. ‘게을러’와 ‘가까스로’ 같은 부사에 주목하자, 시적 화자는 사물의 쓰임새를 관리하는 측면에서 ‘게으른 자’이지만, 어째든 ‘가까스로’ 꽃을 얻는 자이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여기에는 ‘줄기와 뿌리’의 실용성과 ‘꽃’의 비실용적 미적 가치가 충돌한다. 채소밭은 아름다움을 위해 가꾸는 것이 아니라, 채소를 재배하여 먹기 위해 있는 공간이므로, 채소밭에 꽃을 가꾸는 것은 비실용적이고 엉뚱한 행동이 된다. 사람들의 질문에 ‘내’가 낯설어 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나’는 딱히 대답할 논리를 마련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수확의 때를 놓칠 만큼 ‘게을렀으므로’ 그런데 ‘나비 떼’가 등장한다. ‘나비 떼’의 등장은 앞의 시에서의 ‘참새 떼’와 ‘잠자리 떼’의 등장처럼, ‘나’와 ‘열무밭’ 사이의 관계를 다른 차원으로 견인한다. ‘나비 떼’의 등장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상징적인 차원의 대답이다. 그 대답은 시인의 대답이 아니라, 시인이 경험한 어떤 다른 ‘시간’의 대답이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서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극빈」 후반부
열무꽃밭에 나비 떼가 머무는 시간은 인간의 척도로는 짧지만, 나비의 시간으로는 깊고도 밭의 이상한 쓰임새가 드러났다. 열무꽃밭은 사람들에게 싱싱한 채소를 제공해 주지 못하지만, 나비 떼에게 깊은 휴식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 여기에서 ‘나’의 뼈아픈 상념이 떠오른다. 나는 다른 존재가 쉴 만한 ‘무릎-꽃밭’을 내준 적이 없다. 나의 열무꽃밭은 결국 나비의 꽃밭이 되어버린다. 줄기와 뿌리의 실용성 대신에 꽃의 아름다움을 건진 ‘나’는, 그것이 다른 존재를 쉬게 하는 다른 차원의 쓰임새를 얻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발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비 떼’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찾아내는 나비 떼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미적 자율성에 대한 시인의 무자각적인 자각은 타자의 윤리학과 아름답게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시의 제목은 왜 ‘극빈’일까? 무엇이 그토록 가난하다는 말인가? 채소를 놓쳐버린 현실적인 가난 너머의 또 다른 가난, 남은 꽃밭마저 나비 떼에게 잃어버린 또 하나의 가난이 있다. 채소를 잃어버린 가난이 현실의 가난이라면, 꽃을 잃는 가난은 심미적인 가난이다. ‘극빈’은 아름다움을 향한 허영과 욕망마저도 비워버리는 지독한 가난이다. 이제 그 극빈의 미학이 어떤 이미지와 조우하는가를 보자.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
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
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
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때 이(齒)는 감추시게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
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
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별처럼 살다 갔으면
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면
내가 예전에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더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思幕-물의 안쪽」전문
‘물의 안쪽’에는 무엇이 있나? 시의 화자에 따르면 물속에는 뼈‘가 없다. 그런데 ’무릅‘은 있다. 혹은 ’물렁물렁한 바퀴‘가 있다. 중심의 골격은 없지만, 어떤 움직임이 있는 상태, 그것이 물의 안쪽의 상황이다. 그 물의 안쪽으로 스며들면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진다.‘ 물의 안쪽에서 ’나‘는 물처럼 소멸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감각적 주체가 사라진다. 다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이다. 형태와 골격을 갖지 않는 미묘한 물의 움직임, 그것이 물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것은 시의 제목처럼 ’내가‘가 그리워하는 공간, 혹은 내 그리움의 운동 방식 자체이다. 물의 안쪽에서 ’내‘가 사라지는 사건처럼, ’그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이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물의 고요는, ’수평‘에 대한 매혹과 결부된다.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 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수련」전문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지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水平 부분
넝클에서 넝클이
毒 같은 새순이 평면적으로 솟는다
평면에 중독된 나의 疾患 같다
나의 家族歷 같다
스스로 壁을 쓰러뜨리거나 壁을 세워본 일이 없다
몸을 돌돌 말았다 펴며 배를 대고 기는 한 마리 벌레처럼
미지근한 무논에 편편하게 두리번거리는 거머리처럼
한 세게가 평면적으로 솟는다 -「넝쿨의 비유」부분
‘수련’에서 수면 위에 누워 있는 수련이 보여주는 ‘평면의 힘’은 경외의 대상이다. ‘커다란 바퀴’는 수련의 비유일 수도 있지만, 그 수면 위의 우주적 시간성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수평’에서 ‘잠자리’의 수평의 날개 짓은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내 생각’에 대비되는 고요한 정신의 경지이다. 그 경지는 단지 ‘잠자리’의 경지가 아니라, ‘하늘이 길러내는’ 미학에 속한다. ‘넝쿨의 비유’에서 ‘평면’은 시간의 권태를 상징하기도 하고, ‘내 삶의 방식이자 질환이 된다. 그것은 매혹의 대상이기보다는 어떤 피할 수 없는 ’중독‘의 상태를 보여준다. 세 편의 시에서 조금씩 달리 변주되기는 하지만, 수평의 미학은 이 수직성의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매혹이다. 수평의 고즈넉한 미학은, 외형적으로는 에너지와 권위를 갖지 않는다. 문명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수직성을 건설하는 일이다. 인류의 진보는 수직에의 열망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을까? 그러나 수평이란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힘도 보유하지 않는다. 수평의 공간에서 운동 에너지가 발생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들은 그 수평으로부터 어떤 사소한 우주적인 동력을 발견한다. ’평면의 힘‘ ’무서운 수평‘ 평면적으로 솟는다’와 같은 역설적인 표현들 속에서, 수평은 수직의 에너지와 움직임을 전유한다. 문태준의 시에서 수평은 수직보다 힘이 세다.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바닥」부분
먼 곳 수평선 푸른 마루에 눕고 싶다 했다
타관 타는 몸이 마루를 찾아, 단 하나의 이유로 속초 물치항에 갔다
그러나 달포 전 다솔사 요사채, 고요한 安心療의 마루는
잊어버려요
대패날이 들이지 않는, 여물고 오달진 그런 몸의 마루는
없어요
近境에서 저푸른 마루도 많은 날 뒤척이는 流民일 뿐
당신도 나도 한 척의 격랑이오니 흔들리는 마루이오니 -「마루」전문
수직의 세계 속에서 수평의 힘을 발견하는 이런 미학들, 다른 시들에서 수평의 동력은 다양한 이미지로 변형된다. ‘바닥’에서는 가을비와 빗소리의 수직성을 ‘바닥’의 미학으로 전유한다. 이때, ‘바닥’은 수직의 소리를 받아주는 공간이다. 빗소리는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이다. ‘마루’에서 ‘마루’는 푸른 수평선‘의 비유가 된다. 그러나 ’몸의 마루‘는 ’여물고 오달진‘것이 못된다. ’푸른 마루‘와 몸의 루’는 뒤척이는 유민‘이고, ’한 척의 격랑‘이며, ’흔들리는 마루‘이다. 여기서 ’마루‘의 수평성은 안온함 대신에 스스로 흔들리는 몸을 갖는다. 수평은 그 안에 이미 수직의 요동을 포함한다. 첫 번째 시에서 비의 수직성을 완성하는 것이 ’바닥‘의 수평성이라면, 두 번째 시에서 ’마루‘의 수평성은 그 안에 수직의 격랑을 품고 있다. 수평에 대한 시적 사유들은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물과 인간의 ’수평적‘관계에 대한 관심과 연루되어 있다.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초록 뱀눈 같은 싸락눈 내리는 밤 볍씨 한 자루를 꿔 돌아오던 家長이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나는 난생처음 마치 내가 작은댁의 자궁에서 자라난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입이 뾰족한 들쥐처럼 서러워서 아버지, 아버지 내 몸이 무러워요 내 몸이 무러워요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 오나 자루는 나를 이 새벽까지 깨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꿔운 영원을 생각하오니 -「자루」부분
‘자루’의 슬픈 무게는 ‘내’ 육체와 내 실존적 기억의 무게이면서, 그것으로부터 ‘영원’을 사유하는 매개가 된다. 그런데 ‘자루’의 슬픈 무게는 단지 ‘나’ 하나의 자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끊을 수 없는 것과 내가 한 자루’라는 사유에서, 이 ‘세월의 자루’속에서 ‘나’는 다른 존재들과 연루되어 있다. ‘내 몸’이 무러운 것‘은 다만 ’내 실존‘의 부끄러움 때문만이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내 아이‘로 이어지는 이 슬픈 자루의 내력 때문이기도 하다. ’내‘ 실존적 시간의 슬픈 무게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부른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가재미」부분
암 투병 중인 그녀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누워 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가재미’로서의 그녀의 삶을 ‘수평’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녀가 직면한 죽음은 그 수평적인 삶의 연장이자 끝일 것이다. ‘나’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녀의 가재미로서의 삶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표현한다. 하나는 단지 죽음만을 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쏠려있는 가재미 눈을 대신하여,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아준다. 눈앞의 죽음밖에는 못 보는 그녀를 위해 그녀의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도 균형의 시선을 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그녀의 ‘가재미-되기’가 그녀의 생이 처했던 척박한 시간에 해당한다면, 나의 ‘가지미-되기’는 그녀에 대한 사랑의 방식이다. 그대의 파랑 같은 생에 대해, 그 곁에서 수평으로 누워주기, ‘나란한 수평-되기’로서의 어떤 사랑의 방식,
문태준의 시학은 낭만적 자아의 확장을 통해 우주와의 충만한 합일로 나아가지 않고, 서정시의 심미적 권위마저 비워버리는 ‘극빈’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 극빈의 태도는 서정시의 재래적인 위계적 질서를 ‘수평’의 미학으로 전환하는 작업과 결부된다. 사물의 현실적 효용성뿐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주체의 심미적 욕망마저 비우는 극빈의 시학은 사물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사유와 만난다. 이 ‘극빈과 수평의 시학’을 겸손한 서정성‘이라 명명하려 한다. 무엇이 겸손한가? 사물을 일인칭 주체의 인간적 시선으로 대상화함으로써 그것을 단지 ’나‘의 내면의 표상으로만 규정하는 서정시의 근대적 ’오만함‘에 대한 겸손함이다. 그의 시에서 세계는 ’자아화‘되지 않으며, 단지 작은 존재들과의 사소한 교감을 통해 시적 자아는 자신의 존재론을 조심스럽게 탐문한다. 이 겸손한 시적 자아는 어떤 아름다움도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어떤 경우, 문태준의 서정 미학은 불교적인 관념들과 만나기도 하고, 사랑의 수사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 경우에 독자가 만나게 되는 선적인 지혜와 인간에 대한 맑고 선한 사랑이 주는 ‘감동’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것들이 문태준 미학의 핵심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문태준 시학의 개별성을 무화시키는 덕목이기도하다. 문태준의 서정 미학은 ‘관념화’와 ‘동일시’에 대한 근대 서정시의 뿌리 깊은 유혹을 견디면서, 시적 주체의 권위를 보존하려는 서정시의 재래적인 미학을 스치듯 비껴가는 데 있다. 문태준은 90년대에 와서 그 현대성을 다시 획득한 서정시의 문법을 ‘수평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의 서정시학을 사소한 ‘극빈의 미학’으로 재문맥화한다. 문태준에 이르러 한국 서정시는 또 한 번의 미적 진화의 동력을 예감하게 되었다. 그 극빈의 시학 안에서 충분히 아름다운 한국어들의 오묘한 호흡은 스스로 그 아름다음을 자랑하지 않는다. 여기. 지독하게 가난한 시인이 있다. 그는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길」), ‘어긋나는 감각의 면 위를 물뱀처럼 오래 걷는’ (「나는 오래 걷는다」) 중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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